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ハウルの動く城 Howl's Moving Castle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력이 그려낼 수 있는 전형적 이야기[영화평론가 하린]
변함없이 따스한 이야기, 그 판타지의 세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지닌 매력 중 하나는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따스한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의 상상력이 유럽을 향한 일본인들의 맹목적인 애정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것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담긴 독특한 그만의 시선인데, 그 시선에는 바로 생명성에 토대를 둔 자연친화적 혹은 생태적 관점과 문제의식이 각인되어 있다. 상상력의 날개를 무한히 확장하는 것이 일차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며, 실사와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3D 캐릭터들이 난무하는 시기에 여전히 손으로 직접 그리는 정감어린 영상이 또한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적 측면의 특성으로만 그치지 않고, 영상 속에 담긴 스토리에 그만의 고유한 사상과 깊이가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 가장 주목받을 만한 측면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표에 걸맞게 변함없이 따스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익숙한 듯하다 새로운 캐릭터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인 하울과 소피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젊고 잘 생긴 마법사로 등장하는 하울의 경우는 그 동안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접했던 어린 남자애의 캐릭터에 두 걸음 정도 나아간 듯 신선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할머니로 변하기 전의 소피 또한 기존의 작품에서 보았던 소녀적 캐릭터에서 한 걸음 정도 나아간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에 걸려 할머니로 변화한 소피의 외모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강인하게 기억되었던 유바바의 외모와 흡사한 느낌이 강하다. 물론 이러한 느낌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이러한 캐릭터의 유사 반복적 사용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의 보이는 캐릭터들의 면면은 분명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띠고 있는 그들 캐릭터는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이름을 통해 너무나도 많이 접했던 분위기와 유사 캐릭터들 역시 등장한다. 그리고 단 한 순간에 소녀에서 노파로 변신하는 모티브나 허수아비 캐릭터가 마지막에 우려를 빗겨나지 않고서 변화하는 것 역시 기존의 것들을 유용하게 활용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패러디 아닌 패러디의 흔적들은 전체 영화의 테두리 안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느냐에 관건이 있는데, 이견이 있겠지만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형성의 틀과 그것의 벗어남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자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작품이 어느 정도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분야에서, 특정한 방식이나 톤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전형성은 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틀’이라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경우 매 작품마다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움을 지닌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부정적인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적인 요소들이 가득하다. 긍정적으로 인정받아온 그만의 장점들이 고스란히 혼합되어 있는 동시에 그 익숙함과 자기복제의 뉘앙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3D 캐릭터가 아닌 실제 사람이 손으로 직접 그려 만들어내는 작업의 우수함과 장점은 더 이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인생의 황혼을 향해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신선함이나 새로움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얼마의 작품을 본인의 이름을 통해 발표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가슴 따뜻한 애니메이션을 선보일 것이 분명하다.
은유의 세계와 환유의 세계 사이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유독 인상적인 부분은 젊은 마법사 하울이 그의 움직이는 성의 문에 달린 네 가지 색깔의 코드를 통해 세상과 교우하는 지점이다. 특히 검정색에 맞춰져 문이 열리면 오로지 하울만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으며, 그 문 밖의 세계는 철저한 암흑에 뒤덮인 전쟁의 한 가운데로 등장한다. 그 전쟁의 경위나 해결책 등이 간략하게 언급되기는 하지만, 스크린에 투영된 전쟁의 참상은 다분히 인간의 역사 속에 자리한 그것을 닮아 있다. 판타지의 세계에서 거대 서사를 다루게 되면 은유의 세계보다 환유로 세계로 넘어가게 되고, 따라서 역사적 맥락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어쩌면 <해리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차이라고 할 수고 있겠는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 두 작품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듯 보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들에서, 특히 <모노노케 히메>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의 작품에서 인간 역사 속에 자리했던 무의지적인 전쟁의 형상이 자리한 바 있듯이, 그의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아름다운 판타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생태적 주관이 자리하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은유의 세계와 환유의 세계 사이에서, 그 중간 어디쯤엔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그가 일본적 색채를 가급적 배제하면서 유럽지향적인 스토리와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셈인데, 그가 지향하는 유럽은 실제의 유럽이라기보다 그의 머리와 가슴에 자리한 가상의 유럽이다. 때문에 시뮬라크르로써의 그 유럽은 판타지의 세계와 유사성을 지니며 그럴싸한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가능한 공간이며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 속에는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일본적 분위기 또한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이면서, 그리고 일본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으면서, 무시간적인 유럽이라는 시뮬라크르를 지향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지니는 성과와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두 세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무한의 상상력으로 표출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태생적 환경이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무한히 열린 하늘을 지향하는 나무처럼 하나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자체만으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아름답다.
[영화를 보고..]
만화이기 때문에 만화적 상상력의 한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른의 입장에서 보게되면
사건의 개연성이 확실하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그마저도 만화적 상상력으로 스스로 나래를 펴게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피,
마녀의 저주를 받아 할머니로 순식간에 변하게 되지만 긍정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나이로의 여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게 된다.
순무 허수아비의 도움으로 하울의 성에 입성하게 된 소피 할머니의 기상천외 모험담
그리고 각자의 사연과 그들의 개성으로 보여지는 만화의 영상은 아름답기도 하고
참 만화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건 괴물이건 마녀이건 또는 저주를 받은 사물이건..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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